2018년 7월 28일 토요일

새 블로그 오픈 안내

안녕하세요?

<북유럽 민주주의 포럼: 행복 평화 시민 국가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의 새 블로그를 열었습니다. 핀란드 유학 직후 블로그를 시작하던 무렵 6살이던 아이가 어느덧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기에 그의 초상권 등 인격권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블로그 이름과 내용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나아가, 작년 2017년 봄에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제 유학생활의 본 챕터가 마무리되면서 블로그의 내용도 더 본격적인 북유럽 민주주의 관련 연구와 공적 글쓰기(논문, 보고서, 에세이, 언론 기고 칼럼 등) 중심으로 개편하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 해부터 다양한 매체에 기고해온 글들을 갈무리해 올리고 있는데, 향후 새로 쓰이는 글까지 포함해 북유럽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에 관한 단행본 책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할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기존의 블로그인 <선재네 핀란드 이야기>도 유학 과정의 다양한 고민과 생활 체험, 여행, 그리고 핀란드와 북유럽 사회에 대한 저의 사색과 연구의 편린들을 담고 있어 아예 폐쇄하지는 않고 자료실 삼아 남겨두겠습니다. 그 동안 블로그 글을 즐겨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오늘 오픈한 새 블로그에도 많은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7월 29일, Tampere에서

서현수 드림.

* 새 블로그 "북유럽 민주주의 포럼" 가기: https://ndf2030.blogspot.com/

2016년 7월 1일 금요일

근황 혹은 2016년 여름의 한 소식

지난 주 드디어 논문 전체 초고를 제출해 지도교수로부터 승인과 축하(!)를 받았다. 핀란드에 유학온 지 4년 반, 핀란드 학술원(Academy of Finland)의 재정 지원으로 이루어진 지도교수의 4년짜리 연구 프로젝트에 합류한 지 3년 10개월만의 결실이다. <핀란드 의회와 시민 참여>를 주제로 한 나의 논문은 ’의회와 시민 관계’ (Relationship between parliament and citizens) 및 북유럽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영어 문헌들은 물론, 핀란드어로 된 많은 의회 문서와 자료, 그리고 핀란드 의회 의원 및 스탭, 시민사회 인사 다수의 인터뷰 자료 등을 분석해 이루어졌다. (논문의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월 초부터 시작해 서론부터 결론까지 쉬지 않고 글을 써내려 가면서 매 챕터마다 지도교수의 코멘트를 참고해 수정, 완성하는 지난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3월부터는 <Parliament and New Forms of Citizen Participation>이라는 제목으로 핀란드에서의 첫 정식 강의도 진행했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라 핀란드 학생들은 물론 프랑스, 독일, 러시아, 캐나다 등 다양한 나라들에서 온 교환학생들이 다수 참석했는데, 매주 강의 준비를 하면서 논문의 최종 초고를 계속 써내는 작업은 상당한 도전이었다. 지난 해까지 미리 주요 본문 챕터들의 초안을 작성해둔 터였지만 이론적 관점과 분석 틀부터 경험적 연구의 정합성과 함의까지 전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더 넓고 깊게 글을 가다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 사이 한국에선 4.13 총선이 있었고, 미국에선 트럼프와 힐러리가 대선 후보를 사실상 확정지었으며, 유럽에서도 프랑스 올랑드 정부의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총파업과 ’Nuit Debout’ 운동, 그리고 최근 영국의 EU 탈퇴 여부에 관한 국민투표 등 크고 중대한 변화의 흐름들이 이어졌다.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계속 토론하며 숙고했지만, 블로그나 페북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논문 마무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가을 학기에 외부 전문가들을 포함한 논문 심사 위원회가 구성되면 다시 수 개월간의 검토와 수정 작업이 진행된 뒤 최종 ’Public Defence’ 세미나는 아마도 2017년 초에 이루어질 전망이지만, 어쨌든 이번 논문 초고 제출로 큰 고비는 넘은 셈이고 당초 목표했던 유학 생활의 끝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난 수 년간 고향을 떠나 먼 나라에서 고투하며 노력했는데 앞으로의 생활은 당분간 더욱 심한 ’불확실성’의 세계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요즘 한국을 포함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것처럼 최근 핀란드에서도 박사학위 이후의 아카데미 경력을 이어가고, 특히 대학 등에서 안정된 직업적,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 아주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근의 아카데미 경향과 사회 변화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비판은 그것대로 날카롭게 벼리되, 지금부터는 나 또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향후 진로 구상에 들어가야 할 모양이다. 당장 이번 여름 방학부터 우선 순위를 정해 몇 가지 계획을 추진해볼 참이다. 앞으로 맞닦뜨릴 논문 심사 과정을 끝까지 잘 통과하는 것, 그리고 학위과정 이후의 직업적 활동 전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일, 나아가 한층 심화된 연구와 저술, 번역, 교육, 공적 참여 등의 포부를 새롭게 펼치기 -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가기 위한 '지금, 여기' 내 삶의 이정표다.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 드린다.

* 추신. 2016년 여름 핀란드의 풍광 사진 몇 장 함께 올린다. 핀란드에 처음 도착할 때 갓 여섯 살이던 선재는 그 사이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을 수료하고 긴 여름 방학을 즐기고 있다.















2014년 7월 24일 목요일

3. 메트로, 호텔, ‘프로둑띠’, 트램에서 만난 또 하나의 뻬쩨르부르그

- "2014년 여름, 러시아 썅뜨 뻬쩨르부르그 여행기"
 
핀란드 역 앞의 레닌 동상을 뒤로 하고 네바 강변을 따라 걸었다. 다시 긴 다리를 건너 시내 중심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네바 강은 우리의 한강만큼이나 넓었고, 차들은 강변도로를 달리듯이 쌩쌩 달렸다. 다리를 건넜더니 도시의 모습이 점차 바뀌면서 관광책자에서 보았던 샹뜨 뻬쩨르부르그의 모습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한참을 걸었더니 깨끗한 4성급 호텔이 하나 보였다. 옳거니, 저기 가서 다시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데스크를 가서 영어로 물었더니 다른 직원을 불러주었다. 기다리면서 보니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바닥에 수건을 받쳐놓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 이 직원은 친절하게 정보를 찾아 잘 설명해주고 지도를 꺼내 표시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영문 지도가 아니라 러시아어 지도였다!) 이번에는 이 직원의 안내대로 메트로를 타고 가기로 했다. 강을 건너면서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큰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메트로는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다. 어렵사리 메트로를 찾아 들어가 28루블씩을 내고 토큰을 산 뒤 경사진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플랫폼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이가 족히 2백 미터는 될 것 같았다. 지하철역들은 대개 1930년대 소련 시절에 건설되었을 것인데, 그들은 왜 이렇게 깊은 동굴을 파야만 했을까 싶었다. 핵전쟁이 나도 끄덕없었을 것 같고, 서구에 대한 기술발전의 과시 목적이 있었겠지만 이렇게 깊이 파내려간 노동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보다 이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러시아 시민들의 표정이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잠깐의 신기함을 뒤로 하니 지하로 내려가는 우리부터도 어딘지 억눌린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밝지 않았다.
 
메트로에 올랐더니 낡은 기차가 굉음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터널을 스쳐갔다. 에어콘을 틀지 않기 때문인지 창문들을 열어 놓아 엄청난 소음과 탁한 공기가 객차 내로 들어왔다. 승객들은 대개 무표정한 듯 약간 화가 난 얼굴로 침묵하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약간 불안해 보이는 한 젊은 남성이 전화를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초현실적이고 우울한 지하 세계의 느낌! 기차를 한 번 갈아탄 뒤 목적지에 도착해 다시 긴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우리 가족 모두 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역사를 빠져나왔다. 지하철과 그 주변의 풍광이 빚어내는 공간 체험은 20세기 이후 현대 도시생활자들의 공통된 문화적 경험에 속하는 것이지만, 매일 메트로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러시아 시민들에게 이 소비에트적 공공 건축의 유산은 오늘도 심리적 침식 작용을 계속하고 있는 듯 했다.
 

 
 
메트로에서 호텔까지 다시 10여분을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이면도로에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별다른 안전막이나 가림대조차 설치하지 않은 채 인도를 길게 파헤쳐놓았다. 심지어는 한 지점에서 수도관이 터졌는지 흙탕물이 솟구쳐 도로 일부가 침수된 채 방치돼 있었다. 속으로 개탄을 하면서 어렵사리 호텔을 찾아들어갔더니 이번에는 호텔의 외관이 리모델링 중으로 긴 가림막이 쳐 있었다. 데스크의 여직원은 낯선 아시아인을 보고 조금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처음엔 가림막이 쳐있는 방을 주어서 새로 요청해 방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건물 뒤편이 온통 공사중이 아닌가! 허허, 첩첩산중이로세! 애초 뻬쩨르부르그의 도시 규모를 가늠하지 못하고 약간 도시 남쪽에 있는 호텔을 잡은 것이 실수였다. 인터넷에서는 외관이 깨끗하고 가격도 적당해 선택했는데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이미 인터넷으로 3박 요금을 다 지불하고 환불도 안 되는 조건이라 어쩔 도리가 없는 상태였다.
 
방에 들어가 여장을 푼 뒤 나는 까무룩 낮잠이 들었다. 벌써 긴 여행을 마친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잠이 깨 샤워를 하는데 흙탕물이 섞인 듯 물색깔이 누렇고 탁했다. 아차, 바깥 도로에 물이 넘치더니 그 여파인 모양이었다. 유쾌하지 않았지만 참고 샤워를 마친 뒤 데스크에 내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 그런데 데스크의 직원들은 외부 공사 때문에 그런 것 같다며 어쩔 수 없다는 설명만 할 뿐 적극적인 사과나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 같은 것이 없었다. 순진하게 예쁘게 생긴 여직원은 영어마저 서툴러 스스로 곤혹스러워했다.
 
저녁을 먹으러 다시 시내로 나갔다. 메트로는 타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지상으로 다니는 트램을 타기로 했다. 정거장 가는 길에 마실 물을 하나 샀다. 편의점 같은 것이 있나 둘러봤는데 보이질 않고, 낡고 오래된 벽돌 담벼락들 사이로 작은 가게가 하나 보였다. 간판을 보니 러시아어로 프로둑띠’(ПPOДУKTУЫ, PRODUCTI, 말 그대로 물건파는 상점이라는 뜻)라고 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둡고 좁은 실내에 식료품과 담배와 술 등 기호품을 판매하는, 예전의 우리네 골목길 구멍가게가 연상됐다. 세월이 멈춘 듯한 풍경이었다. 간단한 숫자조차 영어로는 소통이 안 되는 초로의 노인이 앉아 무뚝뚝한 얼굴로 돈을 받고 거슬러주었다. 러시아를 유럽의 일부처럼 생각하고 당연히 다수 사람들이 영어를 할 줄 알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착각이라니
 
뻬쩨르부르그의 중심가인 네브스키 프로스펙트근처로 가는 트램이 와서 올라탔다. 트램과 버스의 승차비는 25루블인데, 전자카드도 사용되지만 차장이 따로 있어 돈을 내고 회수권 모양의 티켓을 받았다. 주로 나이든 여성 노동자들이 좌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티켓을 끊어주었다. ‘아직도 차장이 있네’, ‘이건 우리 옛날 회수권 모양이야’, 아내와 나는 신기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중년의 여성 기관사가 운전하는 모습이 투명 가림막 너머로 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상념에 잠겼다. 여행 책자에서 본 아름답고 화려한 옛 영광의 도시, 러시아의 유럽으로 난 창, 북방의 베네치아, 피터 대제가 건설한 샹뜨 뻬쩨르부르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 나는 그 때 여행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오늘 나를 맞이한 건 공교롭게도 피터의 도시(Petersburg)가 아니라 레닌의 도시(Leningrad),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소비에트연방 체제가 남긴 편린들의 연속이었다. 내내 예상치 못한 풍경과 당혹스러운 경험의 연속이었지만 그 덕에 역사의 한 지층과 그것이 표층의 현재와 교우하고 있는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서구 중산층 여행 소비자의 시선을 따라가지 말고, 역사와 자연과 운명의 힘을 때론 거스르고 때론 순응하며 살다간 사람들의 삶을 응시하는 여행자가 되어보자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겪은 자잘한 어려움들은 오히려 달빛에 빛나는 조약돌 같은 행운의 표지들로 여겨졌다.
 




 
저녁은 시내의 한 조지아(Georgia) 식당에서 먹었다. 터키 음식과 유사한 듯 했는데 정갈하고 맛이 있어 기운이 났다. 전채로 주문한 가지 샐러드는 우리의 가지 무침과 아주 비슷했다. 조지아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나라로 러시아, 터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제국에서 독립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 연방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이 본래 조지아 출신이었는데, 당시 그는 조지아 민족주의자 십만 명 이상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2008년에는 조지아 내부 분리주의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분쟁 지역 소재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개입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조지아가 큰 피해를 입고 일부 지역은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 사건은 최근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러시아가 사실상 무력 병합한 사건과 흡사해 다시 한 번 국제적 조명을 받았다. 지정학적 위치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적 분쟁에 계속 시달리는 사람들의 아픔이 떠올랐다.
 



 



 

2014년 7월 23일 수요일

2. 뻬쩨르부르그와 레닌그라드 사이에서

 

- "2014년 여름, 러시아 썅뜨 뻬쩨르부르그 여행기"

 
 
(1) 핀란드 역에 도착하다
 
핀란드 역’(Финляндский вокзал, Finlyandsky vokzal)은 우리가 도착한 샹뜨 뻬쩨르부르그의 역 이름이다. 뻬쩨르부르그에는 두 개의 기차역이 있는데, 하나는 핀란드 헬싱키 방향으로 떠나는 핀란드 역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방향의 기차가 떠나는 모스크바 역이다. 특이하게도 두 역 사이엔 철로가 없이 단절돼 있고, 그 가운데로 네바(Neva) 강이 흘러 발틱 해의 핀란드 만에 닿는다. 네바 강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 있고, 이들이 한여름의 백야 시간대에 들어 올려지는 풍광이 큰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그 중 기차가 지나는 철로 다리는 없는 것이다. 모스크바와 헬싱키, 러시아와 유럽 문명은 그렇게 이어진 듯 단절된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핀란드 역이란 기표가 우리 귀에도 친숙한 것은 러시아의 붉은 혁명가 레닌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 20세기 초반 차르와 그의 비밀경찰의 탄압을 피해 핀란드와 스웨덴을 거쳐 제네바, 파리, 런던, 취리히 등에 머물며 망명 활동을 벌이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자 귀국을 결심한다. 독일 정부의 지원으로 비밀 열차를 타고 독일을 통과한 뒤 배로 스웨덴까지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191733, 마침내 당시 개명된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피터의 도시라는 뜻의 뻬쩨르부르그를 독일식 이름에서 러시아식으로 고쳐 부른 것. 당시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 상태였다.)의 핀란드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으로 활동을 재개한 그는 그해 10월 무장한 볼셰비키 당원들을 동원해,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혁명을 실현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쿠데타에 가까운 행위였고, 이후 러시아는 약 3년여의 내전 상태에 돌입한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한 레닌과 그의 정부는 이후 70년간 지속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고, 그 사이 수도는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그러나 거듭되는 암살 시도 와중에 가슴에 맞은 총상이 남긴 후유증으로 레닌의 건강은 악화됐고, 결국 1924124일 사망했다.
 
그의 사망 이후 뻬제르부르그는 다시 레닌그라드(Leningrad, 레닌의 도시라는 뜻)로 이름을 바꾸었고,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히틀러의 나치 체제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감시와 테러, 투옥과 고문, 집단학살과 강제이주로 점철된 전대미문의 공포의 시대가 전개되면서 수많은 러시아인들과 러시아에 거주하던 소수집단 및 외국인들, 그리고 소련 연방을 구성하던 소수민족들에게 행해졌다. (만주 북동부의 러시아 영토에 거주하던 한인 공동체도 이때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집단 이주돼 큰 희생을 치렀다.) 
 
테러의 시대이후 찾아온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소련은 비록 전승국에 속했지만 약 27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한,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국이었다.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약 900일 간 레닌그라드 봉쇄’(Leningrad Siege)를 단행했고, 이 때 레닌그라드는 인구의 절반이나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잃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나 자신, 여행을 앞두고 뻬쩨르부르그에 관한 책자들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면서 새삼 20세기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했던 러시아인들의 운명이 아프게 다가왔다. 20세기 세계사적 격변의 한 시발점이 된 그 핀란드 역에 나도 도착한 것인가, 잠시 감흥에 잠긴 채 기차에서 내렸다.
 
 
(2) 낯선 나라 러시아의 첫 인상
 
 
멀리 역사와 기차를 배경으로 선재의 사진을 한 장 찍고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가니 곧장 거리가 나타났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 도로 옆으로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 길 건너 낡은 버스 정류장, 낯선 러시아어 간판들과 안내 표지들, 직선적이고 획일적인 소련식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느냐고 달라붙는 택시 기사를 뿌리치고 바지 속의 지갑과 휴대폰에 신경쓰며 빠른 걸음을 했다. 예상했던 것과 아주 다른 풍경 앞에서 어디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가늠이 쉽질 않았다. 택시를 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고, 거리 위로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것이 느껴졌다.
 
건물의 긴 블록을 왼쪽으로 끼고 도니 핀란드 역의 정면과 광장이 나타났다. 인도에 주변지도가 새겨진 안내판이 서있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작은 대합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렵사리 ‘i’ 표시를 발견하고 창구엘 가서 호텔 주소를 보여주며 가는 방법을 물었다. 그런데 아뿔싸, 창구에 앉은 노년의 여성은 영어가 되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센터가 아니라 일반 러시아 승객들을 위한 안내소였던 모양이다. 어쩌랴, 몸 언어를 활용해 소통을 시도했더니 지도 한 장 내주지 않으면서 손짓으로 길을 건너가 메트로를 타라고 했다. 낭패였다.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장소라 당연히 여행 안내센터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거기서 지도와 교통은 물론 주요 여행 정보를 얻을 요량으로 영문 가이드북조차 집에 두고 온 터였다.
 
그나마 여행오기 전에 러시아어 알파벳과 발음을 익히고 온 것이 큰 다행이었다. 거리의 간판과 지명을 띄엄띄엄이나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된 것, 몸으로 부딪쳐야겠다 싶었다. 역 바깥으로 나온 뒤 주변지도 판을 다시 살펴보면서 아내와 상의를 했다. 본래는 인포센터를 들러 트래블 카드를 사고 현지 여행 정보를 얻은 뒤 호텔로 갈 계획이었는데, 일단 역 광장에 유명한 레닌 동상이 있으니 그걸 보고 호텔을 빨리 찾아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길을 건너 광장으로 갔다. 붉은 색의 작은 트램들이 교차로를 돌고 있었다. 80년대부터 운행했을 법한 트램의 색은 하얗게 바래 있었다. 움직일 때는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광장 주변으로 경찰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다. 교차로에서 교통을 정돈하는 하늘색 제복의 경찰들만이 아니라 광장과 거리 군데군데 서 있거나 천천히 배회하는 짙은 군청색 제복의 경찰들이 있었다.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기보다 그저 건달처럼 둘씩 서서 잡담하거나 지나가는 시민들을 관찰하는 것이 업무인 것처럼 보였다. 21세기의 러시아는 여전히 경찰국가인 것인가, 그런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실제로 우리 앞에서 나이든 아버지와 함께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가던 서양 젊은이가 검문에 걸렸다. 시무룩한 표정의 젊은 경찰이 밝은 상의에 반바지 차림의 그를 붙들고 신분증을 요구하는 장면을 마주쳤다. 약간 당황한 듯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권을 꺼내던 청년의 얼굴을 지나쳐 우리는 광장으로 들어갔다.
 
 
(3) 레닌 동상 앞에서의 상념
 
화사한 인공 꽃밭과 대형 분수대를 지나니 멀리 네바 강이 보이고, 그 앞으로 큰 청동조각 위에 한 사내가 강 건너편을 향해 오른 팔을 쭉 뻗은 채 서있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약간 대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양복 재킷 위에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무장한 차량 위에 올라가 우뚝 서 연설하는 그는, 레닌이었다. 그 뒤로 핀란드스키 레일웨이 스태이션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보니 동상의 허릿춤에 모자가 찔러 넣어진 것이 보였다. 번뜩이는 천재와 강철같이 단호한 의지를 겸비한 당대의 혁명가다운 형상이었다. 19172월 혁명 직후에 핀란드 역에 도착해 긴 여행의 피곤함을 잊고 군중들 앞에서 포효했을 레닌의 모습이 그대로 연상됐다.
 
어느덧 그로부터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가 수립한 소비에트 공화국은 혁명의 이상을 배반한 채 테러와 독재, 무능과 부패의 상징이 되어 무너졌고,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선거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한 러시아는 KGB 출신으로 신흥재벌 올리가르히(Oligarch)를 대표하는 인물과 그의 친구들이 새로운 영구지배를 꿈꾸는 정치체제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푸틴과 그 측근들이 샹뜨 뻬쩨르부르그 출신이라는 것이다.
 
만약 레닌이 총상의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그의 사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달라졌을까? 그의 사상이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적 요소들을 진지하게 수용했더라면, 종교와 예술과 인류의 문화적 삶의 양식에 대해 덜 폭력적이고 포용적 관점을 취했더라면 사태가 달라졌을까? 새로운 세기, 러시아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소련 몰락 이후 23년이 흘렀지만 아직 핀란드 역 앞에 건재하게 서 있는 레닌의 동상을 보면서 두서없는 생각들이 구름처럼 일었다.
 
, 한 가지 이야기가 남았다. 이 레닌 동상은 지난 2009년 어느 봄날 새벽에 누군가 설치한 사제폭탄이 터져 허리 뒷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사건을 겪었다. 지금 동상은 2010년 레닌 생일에 다시 원상 복원된 것이라 한다. 문화적 반달리즘(vandalism)의 표출로 비난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다른 한편 레닌으로부터 비롯돼 스탈린의 전체주의 체제로 귀결된 소비에트 시절의 유산에 대해 지긋지긋해 했을 많은 이름없는 러시아 시민들의 원성도 귀에 들려오는 듯 하다. 책을 보니, 뻬쩨르부르그 시내 모스크바 광장에 있는 레닌 동상은 이미 소비에트 시절부터 경찰의 눈을 피해 지속적으로 어떤 무명씨들에 의해 양쪽 눈알이 번갈아 파내지는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당국이 복원해놓아도 소용이 없어 금세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됐다고...